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9 운동 (문단 편집) === 12월 16일 시위 ===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평진 지역의 언론들은 대부분 학생시위를 보도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베이핑 학생연합회는 <선전 강령>을 발표,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내전 중지를 요청하며 매국 정책과 행동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천보다]] 등이 주도하여 베이핑 전 시내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하여 영토와 주권을 팔아먹는 괴뢰조직에 대한 반대와 정부의 투항외교를 반대하는 뜻을 알리고 전국에 항일에 동참하기를 호소하자고 하였다. 또한 학생들은 남하 선전대를 조직하여 농촌에서 항일운동을 선전하기로 결의하였다. ||[[파일:연설하는황경.jpg]]|| || 12.16 시위 중 연설하는 베이징대학생 지도자 황경 || 12월 16일, 기찰정무위원회가 성립되던 날 베이핑 학생연합회의 조직과 호소에 의해 1만명의 학생들이 4개 대대로 나뉘어 천교에 모여, 2만명의 시민들과 합류,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기찰정무위원회를 승인하지 말 것이며 화북의 어떠한 괴뢰조직도 반대, 동북의 실지를 회복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시위에서 400명이 부상당하고 2~30명이 체포되었다. 대규모 반대시위 때문에 기찰정무위원회는 수립을 이틀 연기하여 12월 18일에 성립식전을 거행하였다. 베이핑 학생들의 궐기 소식에 즉각 광저우, 우한, 난징, 톈진, 상하이, 창사, 타이위안, 바오딩, 구이린, 충칭, 시안, 카이펑 등의 전국 각지의 대도시의 학생들이 호응하여 각종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12월 12일 상하이에서 <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이 발표, 전국 각지에서 구국회가 조직되어 학생, 부녀자, 영화계, 문화계, 교육계의 명사들이 앞을 다투어 구국회를 조직하였고 1936년 5월 31일 전국각계구국연합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상하이에서는 학생들이 갑북 경찰국과 북역을 점거하여 장제스가 학생 지도자들을 접견하여 달래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